도서상세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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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수좋은 날
저자 :
현진건
출판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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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판년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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꼭 읽어야 할 한국단편35
저자 : 현진건 등 / 출판사 : 타임기획
운수 좋은 날
저자 : 현진건 / 출판사 : 청동거울
중고생이 꼭 읽어야 할 한국단편소설3
저자 : 현진건 등 / 출판사 : 홍신문화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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폭주가로 소문난 주당의 일장기 말소사건 현진건이라는 이름에서는 문학, 소설이란 말보다 술과 손기정이란 말이 먼저 떠오른다. 주당, 주당 해도 현진건만한 주당은 드물었다. 염상섭, 오상순, 변영로, 양주동 등과 함께 그는 일급 주당이었다. 현진건과 각별히 친했으며 나중에는 사돈이 된 박종화의 말에 의하면 그 주당들의 활약상을 대번에 알 수 있다. 어느 날 문인들이 선술집 순례를 시작했는데, 서울역 앞에 있는 주점에서 시작해 종로를 거쳐서 동대문, 동대문에서 다시 종로까지 오는 동안에 술을 먹었다. 나중에 술을 먹은 잔 수를 계산해 보니 나도향이 곱배기로 70사발, 현진건이 60사발, 박종화가 50사발을 마셨다. 이처럼 그는 가히 술에 살고 술에 죽었다고 할 만큼 애주가였다. 현진건이 단편소설 〈술 권하는 사회〉까지 썼다는 사실을 안다면 그와 술은 불가분의 관계였음을 잘 알 터이나, 현진건과 손기정의 관계에 대해서는 많이 궁금해할 것이다. 하지만 손기정이 베를린올림픽에 출전해 금메달을 딸 때 현진건이 《동아일보》 사회부장이었음을 상기한다면 둘의 관계는 금방 자명해진다. 이 사건으로 현진건은 복역을 하게 됐다. 당시의 이 사건은 피압박 민족의 울분을 대변한 것이었으며, 지금도 우리 언론인들의 저항의식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현진건이 이러한 사건을 주모했다는 사실은 그의 현실인식이나 저항의식의 수준을 짐작케 하는 것으로, 그가 누구보다 강한 민족정신을 가진 작가였음을 입증하는 사례다. 술과 민족정신, 어울리지 않는 두 단어가 현진건이라는 몸에서 서로 만난다.주목받는 신진 작가의 등장 현진건은 1900년 경북 대구에서 우체국장이던 현경운의 4형제 중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그의 작은아버지 현영운은 대한제국 군령부 총장을 지냈으며, 사촌형인 현정건은 독립투사였다. 서당에서 한문을 수학하던 현진건은 1912년 동경의 세이죠 중학교에 입학하여 1915년 졸업했다. 이 해에 대구의 갑부이던 이길우의 딸과 결혼을 한 그는 상해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던 중 사촌형인 정건을 찾아가 호강대학 독일어 전문학교에 입학했다. 이처럼 동경과 상해를 오가며 유학생활을 하던 현진건은 1919년 학교를 중퇴하고 귀국하여 서울 관훈동에서 생활했다. 현진건이 문단에 처음 나오게 된 것은 1920년《개벽》11월호에 처녀작 〈희생화〉를 발표하면서부터다. 처음에 〈희생화〉는 그리 좋은 평을 받지 못했는데, 이듬해 〈빈처〉가 발표되면서 서서히 문단의 인정을 받게 됐다. 당시에는 온갖 잡지가 모두 폐간이 되고《개벽》 하나만 든든한 기초 위에 발행을 계속 하던 때인데, 그 시절의《개벽》은 천도교 기관보라는 색채가 매우 강한, 유치한 잡지였다. 문예란에는 주로 '개벽 사원들의 친척들의 소설' 따위가 실리던 시절이었으므로, 현진건 작품의 광채는 남다른 바가 있었으며, 단숨에 그는 주목받는 신진소설가의 자리를 차지한다. 그의 초기작은 무엇보다 지식인 계층의 청년이 가장으로 가정의 생활상을 그리고 있다는 특징이 있다. 즉 그의 소설은 식민지 조선의 새로운 가정의 정경을 그린 최초의 소설이라 할 수 있다. 한편 현진건도 당시의 대개의 문인들이 그러했듯이 언론인으로 직업생활을 시작했다. 1923년 최남선이 주재하는《동명》의 편집동인으로 있으면서《시대일보》에 입사한 현진건은 정력적으로 단편소설을 발표했으며 언론인으로서의 역할 또한 충실히 했다. 이때의 4∼5년 동안 그의 대표작이라 할 수 있는 주옥같은 단편들이 쏟아져 나오는데, 〈술 권하는 사회〉 〈까막잡기〉 〈운수 좋은 날〉 〈B사감과 러브레터〉 등이 모두 이때 작품이다. 현진건은 《백조》의 동인으로 활동했으며, 같은 동인으로는 박종화, 홍사용, 나도향, 박영희 등이 있었는데, '백조파' 작가 중에서 가장 크게 각광받았던 이가 현진건이었다. 1926년을 전후하여 현진건은 왕성하던 작품활동을 중단하고 기자 생활에 전력했다. 당시 그는《시대일보》에서 《동아일보》로 자리를 옮긴 상태였다. 그가 이렇게 기자 생활에만 몰두하게 된 직접적인 계기가 무엇인지는 명확히 밝혀진 바는 없지만, 아마도 그의 사촌형의 죽음과 관련이 있는 것으로 보인다. 그의 사촌형 현정건은 상해임시정부에서 일하던 독립투사였으며 현진건의 상해 유학시절 그의 보호자이자 후견인 노릇을 한 사람인데, 1924년에 일본 당국에 피검되어 2년 후인 26년에 옥사했다. 평소 가장 존경하고 따르던 형이었음을 감안할 때, 현진건은 이 일로 적지 않은 충격을 받았을 것이다. 이후 드문드문 단편작품을 발표하던 현진건은 1933년 장편소설 《적도》를 《동아일보》에 연재하면서 본격적으로 창작생활을 재개했다. 그러나 그의 제2의 창작기는 오래 가지 못하고 중단됐다. 《동아일보》 사회부장 재직시, 베를린올림픽 마라톤 우승자 손기정 사진 속의 일장기 말소 사건으로 복역을 하게 됐다. 당시의 이 사건은 피압박 민족의 울분을 대변한 것이었으며, 지금도 우리 언론인들의 저항의식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례로 손꼽힌다. 현진건이 이 사건을 주모했다는 사실은 그의 현실인식이나 저항의식의 수준을 짐작케 하는 것으로, 그가 누구보다 강한 민족정신을 가진 작가였음을 입증하는 사례라 할 수 있다. 1년간의 복역 뒤에 출옥한 현진건은 총독부의 압력으로 《동아일보》 사회부장을 그만두고 자하문 밖에서 양계를 하면서 창작에 몰두했다. 당시에는 경제적으로 매우 곤궁하였고 무엇보다 옥살이 때문에 건강이 무척이나 나빠진 상태였다. 생활고와 병마의 이중고에 시달리면서도 현진건은 창작열을 불태우며 꾸준히 작품을 연재했다. 초기에 그는 주로 단편소설을 발표하면서 우리나라 근대 단편양식의 모형을 확립한 작가로 일컬어졌지만, 후기에는 주로 역사소설 쪽에 몰두했다. 《무영탑》 《흑치상지》 《선화공주》를 이때 발표했는데, 모두 실제 역사를 허구화한 역사소설들이다. 가난과 병고와 싸우면서 뒤늦은 창작열을 불태우던 현진건은 광복 2년 전인 1943년 3월, 췌장암으로 세상을 떠났다. 타계하기 1년 전에는 어려운 생계를 꾸려나가기 위해 미두에도 손을 대어 보았으나 실패하고 가산이 파산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결국 그는 자하문 밖 집을 팔고 제기동에 조그만 초가집을 마련해 이사했는데, 이때의 일이 건강을 더욱 악화시켰다. 20세의 어린 나이에 문제작가로 등장한 현진건은 44세의 아까운 나이로 타계하기까지, 작가로서 또한 언론인으로서 많은 업적을 남겼다. 특히 그는 우리 현대문학사에 있어서 사실주의 문학을 개척한 선구자로 기록되고 있다.
▣ 내용을 간단히 말하자면 어떤 겨울날, 동소문 안에서 인력거꾼 노릇을 하는 김첨지는 아픈 아내의 만류를 뿌리치고 일을 나갔다. 근 십여 일을 허탕친 그에게 이 날만은 의외로 많은 손님이 있어 돈을 벌었다. 김첨지는 오늘은 특별히 운수가 좋은 날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좋은 운수가 계속 되자, 김첨지는 서서히 자신에게 다가온 운수를 의심하기 시작했다. 동광학교에서 남대문까지 가자는 손님의 제안을 받고 김첨지는 집에 두고 온 아내를 생각했다. 일원 오십전에 손님을 태우고 가면서 아내에 대한 염려를 잊고자 하던 김첨지는 손님을 내려주고 나자 다시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알 수 없는 불안을 이기고자 새로운 손님을 기다리던 김첨지는 인사동까지 가자는 손님을 태웠다. 그 손님을 다시 내려주고 매우 지친 몸으로 집으로 돌아가던 김첨지는 알 수 없는 불안감으로 몹시 두려운 마음이 생기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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